올로프 팔메 암살 사건의 미스터리 (3)

반응형

안녕하세요,

풍류공대생 입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 스웨덴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총리 올로프팔메의 암살 사건에 대해서 다루겠습니다.

이전 포스팅 내용은 아래 링크에서 자세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올로프 팔메 암살 사건의 미스터리 (1) : 올로프 팔메에 대해서

올로프 팔메 암살 사건의 미스터리 (2) : 암살 용의 세력 1번부터 3번까지


이전 포스팅에서 올로프 팔메 암살 사건의 세번째 용의 세력까지 다루어 봤는데요,

오늘은 마지막 용의 세력까지 다루고,

마무리 결론을 내고 이번 주제를 마감하려고 합니다~






1. 네번째 용의자 : 패테르숀


네번째 용의자인 패테르숀은 단독으로 팔메 암살범으로 지목되어 재판까지 갔던 유일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팔메의 부인이 범인으로 지목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어렸을 적에 연기학교를 다녔습니다. 장래가 기대되는 뛰어난 배우감이었다고 주변에서 칭찬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약물에 손을 대서 학교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팔메 암살 사건 전에 별다른 동기 없이 총검으로 다른 사람을 살해하기도 했습니다. 


1986 5 28 처음으로 경찰의 심문을 받았습니다. 

첫번째 용의자였던 군나르숀과 마찬가지로 무죄원칙에 따라 '42살짜리' 언론에서 칭합니다. 


암살 당일 팔메 부부가 영화를 보고 나온 시간에 극장 앞에서 서성거렸다는 제보가 있었습니다. 

1심에서 무기징역 확정됐지만 2심에서 혐의 없음으로 뒤짚혔습니다. 

실질적인 증거가 없었기 때문이지요.

팔메 부인의 증언이 있지만, 증언은 결정적인 증거로서 작용할 수 없습니다.

무기나 탄약 등의 법의학적인 증거가 있어야 죄를 입증할 수 있는데, 없었습니다. 

또한 팔메 부인이 사건 당일에 충격에 빠졌기 때문에 그녀의 증언의 신빙성이 떨어질수 있습니다. 


2004 그는 두개골 골절로 사망하였습니다. 

심문 과정에서 경찰의 물리적인 심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처음 경찰의 심문을 받은게 1986년이니 20여년 동안 팔마 암살 용의자로 살다가 사망한 것입니다. 

암살에 대한 관심이 있었기에 언론에서도 수시로 접촉하여 스트레스가 극심했을 것입니다. 


2006 스웨덴 공영 방송인 SVT에서 패테르숀에 관한 방송을 하였습니다. 

팔메를 마약상으로 오해하여 오해하여 죽였다고 인터뷰에서 얘기하였데,

이처럼 어떤 날은 결백을 주장하기도 하는 정신질환으로 스스로의 증언은 신빙성이 없다고 보는 의견이 지배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팔메 가족은 패테르숀을 범인으로 아직까지 믿고 있습니다. 






2. 다섯번째 용의자 : 경찰과 군부


스웨덴은 아직 왕이 있는 시스템이기에 총리가 한 나라의 대통령과 다름없습니다. 

그런 총리가 수도 스톡홀롬 거리에서 암살을 당했는데, 스웨덴 경찰과 군부의 무능한 수사가 답답하기만 합니다. 

어떤 나라의 경찰이 수상이 암살되었는데 그렇게 허술하게 대응할 있는가 의문입니다. 


마침 암살 사건이 발생했던 1986 2월이 약물 단속 주간이라 충원된 경찰인력이 추가로 배치되었습니다. 

감시 명령이 해지된 것이 암살 45 전이라 도시에 경찰은 매우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찰의 출동이 늦은 것이지요. 

암살 사고 45초만에 처음 신고를 했으나 경찰은 전화를 받지 않았습니다. 

사고 지점으로부터 1 거리에 순찰차가 있었으나 도착하는데 4분이나 걸렸습니다. 

신고를 받은 경찰 내부 연락망을 통해서가 아니라 근처에 있던 택시 기사가 동료한테 연락하고 경찰차를 세워서 출동한 것입니다. 

그날따라 중앙교신소와 경찰과의 교신이 매끄럽지 못해 범인의 도주로를 차단하지 못했지요.

사건 당일 암살 2 후에 스톡홀롬 다리 밑에서 누군가가 무전기에 대고 말을 하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는 증언도 있었습니다. 

사복을 입었고, 다급하게 무전기에 말을 했고 스웨덴 사람처럼 보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교신한 사람은 결국 발견되지 않았지요.


경찰 내부도 물론 극우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팔메 암살에 관련된 증거는 찾을 없었지요.

경찰이 경찰을 조사하는 것은 어려우니 다른 용의자들에 대비해 소홀히 조사되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습니다. 


2006 암살에 사용되었지도 모르는 총이 발견되었다고 경찰이 주장했습니다.

팔메 암살 3 전에 우체국 강도 사건이 벌어졌었는데, 그때 사용되었던 화약이 팔메 암살에서 사용된 탄환이랑 같다고 발표한 것입니다. 

우체국 강도 사건  근처 호수에 사용한 총기를 버렸다고 했는데, 잠수부들이 그 총을 찾아 경찰에 넘겼습니다. 

경찰이 찾은 것도 아니고, 잠수부들이 자발적으로 찾은 것입니다. 


크리스터 패테르숀 이라는 사람이 2017년부터 수사팀을 이끌게 되었습니다. 

네번째 용의자로 의심 받았던 사람과 이름이 같다니 아이러니 하군요.

그는 사건이 발생한 지 30년이 지난 후에야 수사팀을 맡게 되었습니다. 

나름 경찰 안에서 인정 받는 경찰이며, 과연 어떠한 수사 결과를 보여줄 지 그의 행보가 기대됩니다. 






3. 여섯번째 용의자 :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종분리주의자들


1987 5 남아공 출신 스파이가 팔메 암살을 했다고 신문에 발표가 되었습니다. 

남아공 출신의 스파이 크레이그 윌리엄스를 언론은 지목했지요.

팔메 암살의 작전명은 망치이며, 스웨덴 비밀경찰이 작전 수행을 위한 팔메의 동선을 넘겨주었다고 주장했습니다. 

남아공 출신 스파이가 왜 팔메를 죽였다고 의심하는 걸까요?


앞선 포스팅에서 언급했듯이 팔메는
국제 사회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또한 스웨덴 국민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1위가 넬슨만델라라고 했는데요,

넬슨만델라를 스웨덴 사람이 잊지 못하는 이유가 당시 남아공의 상황을 스웨덴 사람이 알고 있었습니다. 


남아공의 인종분리 사건에도 팔메는 많은 관심이 있었습니다. 

'아파르트 헤이트'라고도 불리는 남아공의 인종분리 사건이 있습니다. 

남아공 백인정권의 의하여 1948 법률로 공식화된 유색 인종에 대한 차별 정책입니다. 


팔메는 이러한 남아공 정부의 인종분리 정책에 반대하는 연설을 하였다.

인종분리 정책은 개혁이 아닌 제거의 대상이며, 

남아공은 새시대의 적응하거나 사라지거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한다고 강도 높게 비난했습니다. 


다른 나라의 정치에 대해서 이렇게 강력하게 말하기는 쉽지 않지만 팔메의 스웨덴은 남아공을 강력하게 제재했습니다. 

1978년의 남아공 공동 제재 프로그램의 후속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남아공 투자, 무역 활동 금지, 컴퓨터 기기, 핵과 관련된 수출을 금지하였습니다. 

스포츠, 문화 교류도 제한하여 봉쇄 작전 수준으로 남아공을 고립시켰습니다. 

UN이나 미국이 하는 행동이 아니라 북유럽 국가가 남아공을 봉쇄한 것입니다. 

스웨덴은 남아공 주변국의 지원 증대하여 '반아파르트 해이트 운동'을 추진하였습니다. 

저같이 한국사만 배운 사람으로는 매우 신기한 행동입니다. 

팔메의 국제적 위상과 명분으로 독일, 프랑스 유럽 국가들도 하나 둘씩 제재에 참여했습니다. 

결국, 1994 '아파르트 헤이트'가 공식적으로 해지되었습니다. 


냉전 체제의 주인공들을 주도적으로 작업하여 성공한 사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과 소련이 팔메를 두려워할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미국은 미국이 경찰이고, 선이라고 주장하고 3국을 악이라고 주장하였는데,

팔메는 미국, 너희도 선이 아니다고 주장한 것이지요.

3 세력을 모아서 의견을 피력하였기에 열강들은 위협을 느낄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1996 남아공 전직 경찰관이 남아공 정부가 팔메 암살에 개입이 있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남아공 정부 중 백인 지도부 세력에서 개입하였다고 말하였다고 하니 의심이 가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4. 일곱번째 용의자 : 이반 비어한의 증언


2012 전직 군인 출신인 이반 비오한이 유투브를 통해 양심 선언을 하였습니다. 

다른 방해를 받지 않도록 일부러 유투브에 공개 발표를 한 것입니다. 

이런 유투브 방송이 유명해지면서 반대로 이반 폰 비오한은 암살 세력이 죽일 수 없는 존재가 됩니다. 


그의 고백에 따르면 전투기 조종사였던 그에게 팔메 암살 의뢰가 들어왔다고 합니다. 

미국 CIA 스웨덴 내부 조력자의 도움을 받아 팔메를 죽였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리비아 독재자 카다피의 부하였던 비어한이 팔메를 살해하게되면 

팔메라는 장애물의 제거와 함께 리비아 침공 명분을 얻게 되기 때문이지요.


비어한은 경찰에 팔메의 암살이 있을 것이라고 미리 말했으나 경찰은 믿지 않았습니다. 

한 가지 추가로 의심되는 것은

암살 현장의 경찰이었던 안티 아부산은 후에 판사가 되어 3 국회의원이 됩니다.







5.마무리


아직 팔메의 암살에 대해서는 많은 미스터리가 있습니다.

범인이 누구인지도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요.


팔메의 죽음은 많은 것을 바꿔놓았습니다.

사랑했던 사람은 아픔의 눈물을, 증오했던 사람은 자신들의 탓으로 죄책감을 느낍니다. 

지금도 스톡홀롬 암살 자리는 팔메를 추모하는 시민들이 종종 있습니다. 

빨간 장미가 팔메의 사민당의 상징이라 빨간 장미가 놓여 있지요.


상황이 바뀔 없다면 복수가 의미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스웨덴 경찰 및 정부는 팔메 암살 수사에 그렇게 절박해 보이지 않습니다.  이상 새기고 싶지 않은 일일 수도 있습니다. 

팔메의 죽음의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요.

팔메의 죽음의 동기는 스웨덴 전체 사회 문제점을 드러낼 것입니다. 

팔메가 걷던 평화, 자유, 연대의 걸음은 어쩌면 그의 죽음과 함께 멈춰버렸습니다. 

팔메의 죽음은 인류의 진보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을 향한 경고장 같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용기와 신념을 따라 사는 사람들을 위축시켰고, 게다가 경고장을 누가 보냈는지 아직도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스웨덴에, 스웨덴에서 비행기로 10시간이나 떨어진 곳에 사는 같은 사람에게도 팔메가 남긴 유산이 남아있습니다. 

가치를 기리고 세계 시민으로 살게끔 노력하게 만듭니다. 

팔메의 죽음을 말씀드리는 이유는 그는 죽음보다 삶으로 많은 이야기를 할수 있는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팔메의 암살로 유명해졌으나 그의 죽음을 조사하고나서는 그의 삶이 정말 궁금해졌습니다. 

그의 죽음이 삶을 증명하기 때문이지요.


여러분도 팔메라는 인물에 대해서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방송을 듣고 팔메의 삶에 대해서 더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영화도 있는거 같으니 관람 후기 남기겠습니다 :)





팟캐스트 '그것은 알고 싶다'를 듣고 

개인적으로 기록한 공간으로 잘못된 정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아래의 공감을 눌러주시면

저에게 많은 힘이 됩니다 :)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