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 성장기, 성탄절 풍경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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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경제 성장기, 성탄절 풍경 변화



크리스마스가 눈 앞으로 다가 왔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먹고 살기 힘들었던 시절에 성탄절을 과연 어떻게 보냈을까 한 번 되돌아보고자 합니다. 




1. 언제부터 우리나라가 성탄절이라고 달력에 빨갛게 표시를 했나요?


사실은 기록을 보면 해방 전 일제 시대부터 성탄절을 기렸다고 합니다. 공휴일로 정하고 대대적으로 기리기 시작한 것은 1950년 부터입니다. 


이게 사실은 전후에 폐허가 된 상황하고 맞지 않는데도 가능했던 이유는 원조 경제의 물자 배분이라는 사회적 이해관계가 걸려 있었습니다. 

당시에 정부 시스템이라는 게 거의 무너져 있었고 부정부패, 무능 등 이런 문제가 만연했는데, 그에 반면에 우리나라 기독교계는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당시에도 미국 유학파 기독교 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이 분들이 현지와 긴밀하게 소통하고 영어가 된다는 강점이 있었기 때문에 미군정 입장에서도 이 분들을 주축으로 해서 원조 물자를 빠르게 배분하는 게 무너진 한국 정부를 통해서 배분하는 것보다 훨씬 효율적이었던 것입니다. 


결국은 미국이 주는 원조이긴 했지만 그게 미국 정부가 주고 한국 정부가 받고 주민센터에서 나눠주는게 아니라, 미국이 주고 교회가 받아 교회가 나눠주는 경우가 많았던 것입니다. 


군수 물자 뿐만 아니라 민간 원조 물자들이 해외에서도 기독교계를 통해서 국내로 들어오고 교회를 중심으로 배급이 되기 때문에 당시에 교회라는 곳은 일단 먹고 사는 문제에 도움이 되는 공간이었던 것입니다. 

또 다른 한 가지는 사람들의 피폐한 마음가짐을 어루만질 수 있는 공간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 역할을 하면서 우리나라 개신교가 급격하게 성장하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종교단체 역할이 중간에서 있었던 것입니다. 


전세계 민간 구호 물품의 절반 이상이 각 국의 개신교 단체를 통해서 국내 유입이 되고요. 

이걸 도맡아서 관리하고 분배한게 국내 몇몇 개신교 지도자들이었는데 이런 식이 확산이 되면서 사람이 어마어마하게 몰려들고, 여기에 물질적인 원조들이 집중이 되게 됩니다. 

그래서 성탄절이라는 게 당시 상황에서 보면 10만명의 고아, 30만명의 미망인 있던 시절인데, 성탄절을 기린다는 게 굉장히 아이너리였습니다. 

신기루 같은 것이기도 했지만, 현실로부터 어느정도 멀어질 수도 있으면서 다녀오면 정말 먹을 것, 덮을 것을 주는 공간이었기 때문에 크리스마스는 좋은 것이라는 인식이 확산이 되었고요. 

1945년부터 1960년 사이에 국내 개신교 신자 수가 10만명에서 100만명으로 늘어납니다. 







2. 야간통행금지에도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예외!


옛날에는 우리나라에 야간 통행 금지가 있었습니다. 

12시 넘으면 다니는 사람 모두 없어야 하는 제도 입니다. 

혹시 집에 못갔으면 파출소에서 자고 가야하는, 12시 넘어서 돌아다니면 붙잡혀 가는 제도 였습니다. 

그 때도 크리스마스 이브에도 이 야간 통행 금지가 잠깐 해지되었습니다. 

야간통행금지 제도가 1945년 9월부터 1982년 1월까지 유지가 되는데, 밤 10시부터 새벽4시까지 상황에서 따라서 탄력적으로 운영이 되었습니다만 이 심야 시간에 못 돌아다니게 했지만 유일한 해방이 크리스마스 이브였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일탈이 허용된 시간적인 공간에 케이크 드세요~ 하는 상업주의가 이때부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언제부터 성탄절에 케이크 먹는 민족이었습니까. 

이 때부터 이런 문화들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요. 

서구의 크리스마스가 가족과 함께 보내는 날이라면 국내에서는 1년에 한 번 밤에 놀 수 있는, 연인이든, 친구들과 즐기는 날이라는 인식이 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때부터 성탄절에 케이크도 팔고 빵집들이 바빠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3. 성탄절 케이크 및 트리


성탄절의 케이크 모양도 재밌습니다. 

굉장히 비싼 베이커리 중심이긴 했습니다만 4단 케이크가 장식은 서구적인 장식을 하고 있는데, 위에 기와를 올리고 있습니다. 

웨딩케이크 같은 4단 케이크인데 맨 위에는 다보탑 같은 게 올라가 있는 것입니다. 

그걸 보면 주모가 드레스 입고 있는 느낌이 듭니다. 

그런 케이크들을 많이 팔기 시작합니다. 1950년 대에도 국가기록원 사진을 보면 1959년 12월 사진을 보면 종로통 거리 상점에서 X-mas 트리 장식 판매점 등의 간판들이 보입니다. 노점에서 장식품을 파는 모습도 엿 볼 수 있는 것이지요. 


요즘에도 그런지 모르겠습니다만 카드 주고 받고, 크리스마스 씰을 붙이고, 길거리에서도 카드 많이 팔았습니다. 시청 앞 광장에도 나랏 돈으로 성탄절 트리도 하나 만들어서 장식도 합니다. 휴전선 인근에도 거대한 트리를 만들어서 전방에 있는 북한 병사가 볼 수 있게 합니다. 대북 심리전의 일환으로 였습니다. 남으로 오라 라는 구호를 붙이는 것보다 남한의 발전된 경제적인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것이 크리스마스 트리였던 것입니다. 해서 1954년부터 서부 전선 애기봉에 성탄 트리가 불을 밝혀 왔습니다. 1964년에도 휴전선 인근에도 크리스마스 트리가 설치가 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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