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대통령 간단 정리

팟캐스트,/이이제이|2017. 9. 26. 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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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풍류공대생입니다~


팟캐스트 [이이제이] 대한민국 대통령 특집 세번째 시간입니다!

이승만, 전두환 대통령에 이어 오늘은 노태우 대통령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합니다~





1. 유년 시절


노태우는 1932 8월 대구 팔봉산에서 태어납니다.

부모님이 결혼 8년만에 장남 노태우를 얻게 되지요.

그의 집안은 뼈대 있는 가문 중 하나였습니다. 

노태우는 조선 전기 문신이었던 노사신의 16대손입니다. 

노사신은 문장을 통한 정치를 꿈꿨던 사람으로서 경국대전 집필 책임자이기도 했습니다. 

세조와 성종의 총애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훈구파의 일원으로 사림파의 비난을 많이 받은 인물이었습니다. 


노태우가 어렸을 당시에는 집안 형편이 좋지 못했다고합니다. 

그 와중에도 그의 음악적 소질은 뛰어났는데, 한 일화로 노태우가 작곡한 곡을 조영남과 패티김이 불렀습니다. 

앨범도 있으며 어떤 곡은 본인이 직접 불렀다고 합니다. 

노래도 잘하며 베사메무쵸를 애창했다고 합니다.


그의 별명은 노정승이었는데, 친구끼리 싸우면 화해를 시켜서 입니다. 

또한 우유부단한 성격이라고 평해집니다. 



경북중학교에 편입하였으며, 

1950년 6.25 전쟁에서 학도병으로 참가하기도 했습니다. 


그 후 육군사관학교에 11로 입학하였습니다. 

전두환, 김복동, 노태우는 모두 육사 11기로 동기였습니다. 


1955년에 김복동의 여동생인 김옥숙과 결혼식을 올리게 됩니다. 






2. 군인 시절


1961년에 5.16 쿠테타에 동참합니다.

노태우, 정승화 주도의 친 쿠테타를 주도하기도 하였습니다.


1968년에는 베트남전에도 장교로 출전하였으며,

1979년에 대장으로 전역하고 정치권으로 입문하게 됩니다. 






3. 전두환 시절


12.12 사태를 위해 군대를 보냅니다. 

파주 전방 부대를 불법으로 이동해서 중앙처로 보내 정권을 찬탈하였습니다. 

이렇게 베스트프렌드인 전두환을 위해서 목숨을 바쳤으며, 후에 전두환에 이어 2인자에 오르게 됩니다. 

성공했기에 망정이지 전쟁 상황이였으면 전방 부대를 불법으로 이동했다는 것은 심각한 행동입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위해 체육부 장관을 역임하였습니다. 

장관을 역임하면서 외교적 안목을 키우게 됩니다. 


영원한 2인자인 김종필이 노태우에게 다음과 같이 2인자의 처세술에 대해 조언도 했다고 합니다.

2인자가 길은 발톱을 숨기는 것이다.

전두환이 하는 일에 대해서 표정을 숨겨라.





4. 노태우 대통령


전두환 다음으로 불법인 체육관 선거로 대통령 당선될 있었으나 6월 민주화 운동의 결과로 전두환이 직선제를 제안하게 됩니다. 

이를 6.29 선언이라고 합니다. 

이 선언의 내용은 대통령 직선제를 도입하자는 것이 주 목적입니다. 

이에 노태우는 김대중의 사면 복권을 요청하게 됩니다.

민주화 운동으로 인기있는 야권의 정치인 김대중을 노태우가 사면 복권을 요청하다니 이해가 안되지만

이것은 노태우의 정치적 판단이었습니다. 

직선제로 김영삼과 1:1로 붙으면 불리하니 사면 받은 김대중과 김영삼을 경쟁시켜 노태우가 당선되고자 하는 작전이었습니다.

그러나 언론의 반응은 노태우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합니다.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는 민정당 후보로 출마합니다.

'나 노태우는 보통 사람입니다.' 라는 구호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선거 기간 중에 KAL 폭파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는 안기부가 여권 후보인 노태우의 당선을 지원하기 위해 북풍을 만들었다는 루머가 있습니다. 

북풍에 힘입어 노태우는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대통령이 된 후, 전임 대통령이었던 전두환과 분리 작업을 실시합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노태우 대통령 당선  전두환이 수렴청정을 하려고 했으나 전두환의 5공화국과 노태우의 6 공화국은 다르다고 주장하였습니다. 

5공화국 핵심 인사들을 공천에서 탈락 시키기 시작했습니다. 

대통령 취임식 때부터 전두환을 크게 대접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전두환은 88 서울 올림픽 개막식에 참가하고 싶었으나 노태우는 초청을 하지 않습니다. 

결국 전두환은 개막식을 TV로 보게 됐지요. 





5. 총선


국회의원 총선에서 노태우의 민정당이 압승할 것으로 예상했으나 헌정 사상 최초의 여소야대가 이루어졌습니다. 

국민들이 야권에 힘을 실어준 것이지요.

광복 후 첫 여소야대라 친일, 독재 적폐 세력을 엄벌할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이에 일환으로 5 청문회가 열렸습니다. 


그러나 당시 야권의 수장이었던 김영삼은 노태우, 김종필과 함께 3 합당을 하고 맙니다.

국민이 야권에 힘을 실어주었으나 김영삼은 본인이 대통령이 되고자 국민들의 뜻을 져버린 셈입니다. 

두고두고 아쉬운 순간입니다. 






6. 6공화국의 업적


6공화국의 최대 업적은 북방 외교입니다.

이 당시에 소련, 헝가리와의 수교를 맺고,

남북한이 UN에 동시 가입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통일 분위기가 조성되었으며, 

일본, 미국에 편중된 외교 정책에서 동유럽으로 넓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긍정적인 면에 비해 사회주의 국가에 매우 저자세로 외교하였고, 공산당에 대한 국민적 합의가 없었다는 비판적인 시각도 있습니다. 


이동 통신 사업도 6공화국에 시행됩니다. 

노태우의 딸이 선경 그룹(오늘날의 SK)의 최태준과 결혼하게 됩니다.

이에 SK가 이동 통신 사업권을 받게 됩니다. 

대통령이 사돈한테 이동 통신 사업권을 준 셈입니다. 

이러한 혜택으로 스피드 011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7. 비자금 문제


퇴임 후에 4000억원이라는 천문학적인 숫자의 비자금이 있다는 제보가 들어오게 됩니다. 

이러한 제보는 김영삼의 측근인 서석재 전 장관으로부터 입니다. 

그는 보궐선거에서 상대방 후보를 돈으로 매수하려다가 실형을 선고 받은 적이 있습니다. 

김영삼의 잘못을 대신 덮어썼는데, 김영삼은 이로 인해 입지가 좁아져 3 합당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추후 김영삼 대통령 자신을 위해 희생한 서석재 총무처 장관에 앉히게 됩니다. 


그런 서석재 오프더레코드로 기자들에게 전직 대통령 명이 비자금 4000억원 2000억을 김영삼한테 테니 자기한테 2천억원을 달라. 라고 이야기해버립니다. 

그러나 조선일보에서 오프 레코드를 어기고 언론에 공개하게 됩니다. 

당시 금액이 워낙 어마어마하게 커서 여론은 반신반의하였습니다. 

그러나 여당 인사 신진급 박계동이 조금씩 증거를 대며 다시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하였고 

결국 노태우는 공개적으로 사과하게 됩니다. 

이에 김대중도 노태우로부터 20 비자금 받은 것을 대국민 사과하게 됩니다. 

이러한 도덕성 시비가 결국 김영삼 대선자금 의혹으로 이어져 사회적 이슈가 되었습니다. 


김영삼 대통령 시절에 역사 바로 세우기의 일환으로 전두환, 노태우는 법정에 구속되었으나

후에 사면을 받고 추징금만 납부토록 되었습니다. 

노태우는 그래도 추징금을 전두환보다 많이 냈다고 합니다.


현재는 투병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상으로 노태우 대통령 간단 정리를 마쳤습니다.


어렸을 적에 노태우 대통령의 모습을 TV에서 봤던 것이 기억납니다.

그때는 아무런 생각 없었는데,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난 지금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포스팅이었습니다. 



팟캐스트 '이이제이'를 듣고 

개인적으로 기록한 공간으로 잘못된 정보가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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