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대통령 간단 정리

팟캐스트,/이이제이|2017. 9. 28. 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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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풍류공대생입니다~



팟캐스트 [이이제이] 대한민국 대통령 특집 네번째 시간입니다!

이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아래를 참고해서 주세요,

이승만 대통령 간단 정리

전두환 대통령 간단 정리

노태우 대통령 간단 정리


이번 포스팅에서 다룰 대통령은 김영삼 대통령입니다.

어느덧 1950년에서 격동의 7,80년대를 지나 1990년대로 넘어 왔네요,


사실 저는 개인적으로 노태우 대통령은 너무 어렸어서 잘 기억이 안나고,

김영삼 대통령 때부터 기억이 나네요,

어려서 잘 몰랐지만 이번 기회를 통해서 어떠한 공과 과가 있는지 알아보도록 해요!


그럼 시작해보겠습니다~




1. 유년 시절


김영삼은 1927년 경상남도 거제시에서 출생했습니다. 

그의 본관은 김녕 김씨이며, 백촌 김문기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거제에서 부유한 집안의 외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 김영삼은 공부는 못했으나 근성이 있었다고 합니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에 통영중학교를 다니는 와중에도 사건 사고를 많이 겪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해방 이후의 고등학교를 다녔던 김영삼은 하숙방에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이라는 종이를 벽에 써서 붙였다고 합니다. 

요즘은 대통령을 꿈이라고 말하는 학생들은 극소수지만, 

제가 학교를 다니던 시절까지만 해도 초등학교에 장래희망을 조사하면 꼭 5명은 대통령이 있었습니다. 

그런 대통령의 꿈을 가진 김영삼은 결국 진짜 미래에 대한민국 14대 대통령이 됩니다. 




2. 정계 입문


그는 서울대 철학과 입학하였으며, 그의 웅변 실력을 높이 장택상의 선거운동을 돕는 일을 통해서 정계에 입문하게 됩니다. 

친일경찰 노덕술을 총애하고 여운형 암살에 대해 적어도 방조하는 등의 의심스러운 점이 많은 장택상의 선거 운동에 도움을 주면서 김영삼은 정계에 입문하게 됩니다. 


이때 추후에 영부인이 되는 손명순 여사와 만나 결혼합니다. 


장택상의 비서로 활동하다 장택상의 은퇴 이후 거제에서 국회의원 선거에 나설 것을 결심하게 됩니다. 

자유당의 공천을 받아 만 25세의 최연소 국회의원에 당선됩니다. 


이승만의 자유당에 몸을 담고 있는 처지였지만 사사오입에 분노해 탈당하여 민주당에 가입하게 됩니다.

후에 민주당의 일부가 만든 신민당으로 적을 옮깁니다.


1971년 40대 기수론을 주장하며 박정희에 대항하여 

대통령 후보 경선에 참여하나 같은 당내의 라이벌인 김대중에게 패하였습니다. 




3. 유신시대


10월 유신이 선포된 이후로 망명한 김대중에 반하여 김영삼은 귀국을 결심하고 국내에서 많은 정치적 제한을 받게 됩니다. 

그 중에 하나가 YH 여공 사건입니다. 

회사 정상화와 노동권 회복을 위해서 주장하던 YH무역 노동자들이 김영삼이 있는 신민당에 호소장을 제출하였고, 이에 김영삼은 신민당사를 노동자들에게 농성 장소로 빌려주고 경찰권으로부터 지켜주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김영삼은 총재직을 박탈당하였으며, 국회의원에서 제명되었습니다. 


이에 대한 반발로 많은 신민당원들이 항의를 표시하였고, 김영삼의 고향인 경남에서 부산, 마산을 중심으로 시민들이 독재에 대해서 시위를 벌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를 부산과 마산의 앞 글자를 따서 부마항쟁이라고 합니다. 


그 해 10월 26일 박정희는 김재규의 총알에 의해 목숨을 잃었으며 

역사는 새로운 변환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4. 신군부시대


12.12 사태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은 내란 혐의로 김대중에게는 사형을, 김영삼에게는 가택 연금을 지시했습니다. 

웃긴 것이 원래는 김대중, 김영삼 모두 사형 선고가 내려졌어야 했으나, 

각각 호남과 영남을 대표하는 두 인사가 사형 선고가 내려지면 두 지역의 민심이 합심할 것을 두려워 해 인구가 많은 영남을 대표하는 김영삼에게는 상대적으로 가벼운 형이 주어진 것이라 합니다. 

이때부터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세력이 있었다고 하니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앞선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 정리편에서 언급했지만 

4.13 호헌으로 민심이 격분하면서 6월 항쟁을 통해서 대통령 직선제를 채택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국민들은 다가올 대통령 직선제에서 군부 독재 시절을 마치고 민주화의 승리를 기대하게 됩니다. 





5. 13 대통령 선거


13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총 3명의 주력 후보들이 있었습니다. 

이 선거에서 노태우는 36%의 득표율을 얻으면서 당선되었습니다. 

당시 김영삼이 28%, 김대중이 27%의 득표율을 기록하였습니다. 

역사에 만약이란 없지만, 만약 김영삼과 김대중이 노태우에 항거에 단일화를 이루었다면 13대 대통령은 다른 사람이었지도 모릅니다. 


다만 총선에서는 이 둘의 단일화 실패에도 불구하고 여소야대 정국이 만들어졌습니다.

김대중과 김영삼이 합심하여 노태우의 민정당을 잘 견제하고 있었지만, 

노태우 정리편에서 언급하였던 서석재 의원 사건을 통해서 김영삼의 입지가 불리해지자 

본인의 판세를 뒤엎기 위해서 김영삼은 3당 합당을 결심하게 됩니다. 


노태우, 김종필, 김영삼의 합당으로 김영삼은 야당에서 여당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이는 기회주의자들의 목숨을 연명해준 최악의 결정으로 평가됩니다. 

당시 김영삼이 직접 등용했던 노무현 의원도 3당 합당에 반대해 탈당하였습니다. 





6. 14 대통령 시절


김영삼은 어렸을 적 꿈이었던 대통령을 드디어 이루게 됩니다. 

여당으로서의 입지를 탄탄히 세운 그는 14대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과거 군부 세력이었던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와 달리 '문민정부'라는 이름하에 출범합니다. 

그의 일환으로 대표적인 활동이 하나회 해산입니다. 

하나회란 박정희 시절에 전두환, 노태우의 육사 11기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일종의 친위대로, 군 내부의 사조직입니다.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던 하나회 조직을 없애기 위해 1주일 사이에 40개의 별들을 떨어뜨렸습니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일본의 잔재인 조선총독부 청사를 폭파하였습니다. 

지금은 광화문에 가면 경복궁을 볼 수 있지만, 1990년대까지만 해도 광화문은 조선총독부 건물에 의해 가려져 있었습니다. 

아직도 TV로 본 조선총독부 폭파 장면은 기억에 남습니다. 


그리고 금융실명제를 도입하게 됩니다. 

지금은 당연하게 생각하는 은행에 내 계좌를 만들때 실명을 적어야 하지만 이 때까지만 해도 가명으로 만들수가 있었습니다. 

자금의 흐름이 투명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너무 무리했을까요,

경제 성장을 기록하던 대한민국은 금융위기를 맞이하고 IMF의 지원을 받게 됩니다. 


성수대교 및 삼풍백화점 붕괴 등 

많은 사건 사고가 있었던 김영삼 대통령 재임 이었습니다. 






지금은 돌아가시고 안계시지만 인간적인 매력이 있는 대통령이었다고 합니다. 

3 합당은 매우 잘못된 행동이었고, 나중에 본인도 후회했지만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호불호가 있지만 그 정부에 비해서 민주적이고 개혁적이었다는 평을 듣습니다. 




팟캐스트 '이이제이'를 듣고 

개인적으로 기록한 공간으로 잘못된 정보가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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