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중동 특집 1. 조선일보

팟캐스트,/이이제이|2017. 10. 12. 2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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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풍류공대생 입니다~


여러분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들을 어떤 매체를 통해서 접하나요?

요즘은 인터넷이 발달해서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핸드폰으로 기사를 찾아볼 수 있는데요.

언론사 기사라기 보다는 포털에 올라와 있는 제목을 클릭하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예전만 해도 신문이나 라디오를 통해서 뉴스를 접하는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저희 집도 아직 종이 신문을 정기 구독하고 있고요,


오늘은 신문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가장 유명한 신문이라고 하는 조중동.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를 줄여서 조중동이라고 부릅니다. 

오늘의 조선일보부터 시작해서 하나씩 알아보려고 합니다. 





1. 조선 시대 신문


조선일보를 이야기하기 앞서 우리나라 신문의 역사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우리나라의 첫 신문은 조선 시대 때부터 있었는데요.

실질적으로 언론의 역할을 했던 신문고인 조보가 있었습니다만 실질적으로 왕에게 건의가 들어가진 않았습니다. 

 

교과서에서 들어봄직한 한성순보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신문입니다. 순수 우리나라 신문이라고 배우지요.

그리고 독립신문이 있습니다. 오늘날 신문의 날이 4 7일인 이유가 독립신문 창간일이라서 라고 하는데요. 의미있는 신문입니다. 

또한 독립운동가들이 활동했던 신문인 황성신문도 있었지요.


이렇게 신문이 독립 운동의 역할을 하자 일제치하에서는 모든 신문이 폐간되었습니다. 

언론의 역할을 막아버린 것이지요.

그러나 1919 3.1 운동 이후 조선의 반발을 겪은 일본은 이렇게 억압 정책을 펼쳐서는 안되겠다 생각합니다. 그래서 일본의 조선에 대한 유화 정책의 일환으로 신문의 창간을 허락합니다. 

그렇게 해서 생겨난 것이 친일신문인 조선일보

그나마 조금 괜찮은 동아일보 

그리고 친일신문인 시사신문이었습니다. 





2. 방응모의 조선일보



일제 강점기 아래에서 조선일보는 백성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습니다. 친일 성향이 강했던 터라 백성들이 외면했던 것이지요.

조선일보는 무관 출신의 친일파인 송병준 사장을 임명합니다. 

그는 김옥균이 일본에 망명하자 김옥균을 암살하러 일본으로 가나 오히려 그에게 감화되어 청일전쟁에서 일본에게 붙습니다.

일진회의 일원으로 을사늑약 전에 미리 조선의 외교권을 일본에게 줘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일본 몰래 헤이그특사를 파견한 고종의 퇴임을 주장하기도 한 친일파입니다. 


이러한 친일파가 사장으로 있는 조선일보를 민중들이 친일파 신문이라고 외면하자 송병준 사장은 해임됩니다. 

이어서 신석우 부사장  민족지도자 이상재 사장을 임명합니다. 

동아일보 쪽 사람들을 많이 데리고 와서 조선일보에 혁신을 가하기 시작합니다. 

여성을 위한 부인란 코너를 만들고, 여기자를 채용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동아일보 출신 기자들의 성향으로 인해 일제의 탄압을 받기 시작합니다. 

압력에 못 이겨 계속 사장이 바뀌게 됩니다. 

사장이 계속 바뀌다보니 정상적인 신문 발간이 어렵게 되기에 이릅니다. 


이를 독사의 눈빛으로 조선일보의 행보를 바라본 이가 있었으니 

그 사람이 그 유명한 방응모입니다. 

방응모의 방씨 일가로 예전에 동아일보 국장을 하던 인물입니다. 

광주에서 신문이 팔리지 않아 고군분투하다가 짤리고 고향 이북에서 금광을 개발해서 떼돈을 벌게 됩니다. 

금광을 개발해서 번 돈으로 동아일보의 라이벌인 조선일보를 인수합니다. 

조만식 전사장을 고문으로 임명하고 공격적인 경영을 시작합니다. 

조석간 신문을 6면으로 늘리고, 동아일보로부터 대대적인 인사 채용을 실시합니다. 

과거의 복수인 셈이죠. 


그는 기자의 학력을 매우 중요시했습니다. 그러한 기준이 아직도 남아있는걸까요. 지금도 조선일보는 기자 뽑을 학력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이는 방응모 본인의 학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컴플렉스로 작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1920 동아일보가 신동아 잡지를 발간하자 조선일보도 얼른 잡지를 발간합니다. 

이때만 해도 조선일보보다는 동아일보가 민족지의 느낌으로 앞서나가고 있었습니다. 

조선일보도 얼른 '소년', '여성'이라는 잡지를 발간합니다. 

동아일보는 신문에 광고를 얻기 위해 일본 광고주를 기생 관광 시켜 주기도 하자 조선일보 또한 맞불작전을 펼치기도 합니다. 


1938 6 15일자 조선일보 사설에 황국 식민을 위해 백성들의 병사 지원을 독려하는 사설을 냅니다. 

이렇게 열심히 일본을 찬양하는 내용의 사설과 논평을 내보내선 눈치를 보지만,

일본은 전시체제라 신문사는 필요 없다고 생각해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폐간 시킵니다. 

대신 일본은 폐간 하면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한테 돈을 주며, 잡지는 여전히 남아 있어서 친일 활동을 활발히 했습니다. 






3. 해방 직후


미군정 시대는 대한민국 역사상 언론의 자유가 가장 있었던 시대였습니다. 

좌익, 우익 신문사들이 매우 많이 창간됩니다. 

보수 우익에 비해 좌익이 말빨이 쎄서 이는 곧 남한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에게 불리한 입장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한반도의 공산화가 무서웠던 미국은 좌익 신문을 모두 없앱니다. 

그리고 좌익 견제용으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복간시킵니다. 

그래서 이 두 신문은 보수 우익임을 표방하게 되지요. 

한국의 언론 발전을 위해서 복간시켰다기 보다는 미국의 이익을 위해 소련을 견제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합니다. 






4. 6.25 전쟁


6.25 전쟁이 발발하자 조선일보는 휴간합니다. 

전쟁 통에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는 납북됩니다. 


방응모를 대신해서 장기영이 사장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장기영은 판매부수를 늘리며 탁월한 성과를 보여주지만 그의 스타일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은 방씨 일가들이  장기영을 해임시킵니다. 

후에 장기영은 조선일보를 나와서 한국일보를 창간합니다. 

조선일보는 29살의 방응모 손자 방일영 사장으로 취임시킵니다. 

이 분이 밤의 대통령이라는 별명을 처음 들은 사람입니다. 

방응모, 방일영에 대한 내용은 나중에 다시 포스팅하겠습니다~




5. 박정희 정부 시절


박정희 정권 시절에 민족일보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는 신문인이 극형과 중형을 받은 첫번째 사례로 기록됩니다. 

민족의 진로를 가르치는 혁신적이고 진보적인 신문이었던 민족일보는 북한과의 통일 운동을 주장하였습니다. 

5.16 쿠테타 이후로 옳은 소리를 해서 박정희가 곱게 보지 않았으나 명분이 딱히 없었습니다. 

그러나 빨갱이 프레임을 씌운 후 민족일보를 탄압하기 시작해서 결국 폐간시키고 맙니다. 

관련 인물들은 사형 또는 10 넘게 징역을 선고받습니다. 


이렇게 언론사의 역할을 했던 신문사는 폐간을 당한 반면에 조선일보의 태도는 달랐습니다. 

박정희 정권을 열심히 지지했던 것입니다. 

이에 정부의 특혜를 받아서 1968년에 코리아나 신축 토록 허가받습니다. 

박정희가 방일영에게 조선일보 사옥이 태평로 거리에 조금 튀어나와 있으니 건물을 헐고 새로 짓는게 어떠냐고 제안합니다. 

박정희가 차관 4천만 달러를 땡겨 줄테니 태평로 거리 뒤로 물러나서 새로 짓도록 제안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4천만 달러는 한일협정으로 인해 받은 조상들의 핏값을 조선일보 이익을 챙겨 주기 위한 돈은 아니었습니다. 

기간 산업도 아니고 코리아나 호텔과 같은 관광 산업에 돈을 사용하 여론이 안좋았습니다. 


1970년에는 지하철 건설에 참여합니다. 

일본으로부터 지하철을 비싸게 사와 한일협정 때 받은 돈을 돌려준 셈입니다. 

일종의 리베이트였던 것입니다. 


3 개헌 때도 조선일보 방일영은 브레인 역할을 합니다. 

유신헌법 때도 조선일보는 박정희 대통령을 영도자라고 열심히 지지합니다. 





6. 전두환 정부 시절


1980년 5월 18일 광주 민주화운동이 벌어졌을 때도 군인들이 광주 시민들에게 자제의 자제를 거듭하였다 라고 거짓 사설을 썼습니다. 

기존은 신문사 순위에서 동아일보가 1위였으나 이러한 논조를 유지하여 신군부를 열심히 지지하였기에 기존 4위에서 대한민국 1 신문사로 발돋움하게 됩니다. 






7. 김영삼 시절


3당 합당을 추진했던 김영삼을 밀어서 대통령으로 만드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신문의 사설에서는 특정 후보자를 지지할  있습니다. 신문사의 입장을 나타내는 것이 사설이니깐요. 그러나 당시에 조선일보는 기사에서까지 중립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YS - DJ - 정주영의 3파전이었으나, 조선일보에서는 정주영에 대한 기사를 의도적으로 빼서 YS-DJ 양강 체제를 만듭니다.

정주영에 관한 기사를 뺀 이유는 정주영이 YS 표가 겹치기 때문입니다. 보수 지지층이 둘로 나뉘어 표가 분산된다면 김대중이 대통령이 될 것이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본사에 유리한 방향을 위해 지금도 원하는 방향으로 유도하는 기사를 내보냅니다. 

당시에 기사 순서, 기사 내용 모두 YS 유리하게끔 작성되었습니다. 






8. 김대중 정부 시절


김대중의 당선을 막기 위해 이회창에 대한 긍정적인 기사를 많이 작성하였습니다. 

이에 김대중 대통령은 조선일보와 화해를 하려고 여러차례 시도하였으나, 조선일보는 정권을 향해 계속 공격하였습니다.

지금까지의 대통령은 자기들이 뽑은 대통령이라 서로의 이익을 위해 굽신굽신 했지만 김대중 정권을 실패한 정권으로 만들려고 노력하였습니다. 

호남 인사들이 정권을 싹쓸이했다는 근거 없는 기사를 내기도 합니다.






9. 노무현 시절


조선일보는 대통령 선거에 앞서 노무현의 경선 통과를 막고자 많은 비난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그래서 노무현은 "민주당 경선에서 조중동은 십시오"라고 전면 승부를 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노무현이 경선 당선되고 대통령 선거 전날, 다음과 같은 기사를 내서 국민을 우롱합니다.

"정몽준 노무현 지지 철회. 국민의 현명한 판단 바란다."

여기서 말하는 국민의 현명한 판단이란 결국 정몽준도 노무현 지지 철회했으니 국민들도 오늘 선거에서 현명하게 판단해서 지지하지 말라 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이러한 기사가 국민들의 결속을 이끌어 내게 되어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됩니다. 


당선 후에도 지속적인 실패한 정부 만들려고 깍아내립니다. 

결국 다음 정권은 이명박 정부가 이어받습니다. 






10. 이명박 시절


이명박 정부도 말기에는 레임덕에 실패한 정부로 만들기위해서 이명박과 박근혜를 분리시킵니다. 

이명박이 실패한 정부이기 때문에 조선일보가 이명박 정부를 비난하여 조선일보가 원하는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포스팅을 하면서 

영화 [내부자들]이 머릿 속에 떠오르네요.


언론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시간이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동아일보에 대한 포스팅으로 찾아뵐게요~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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